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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히나] 장미 한 송이

에루* 2016. 4. 10. 00:08

[스가히나] 장미 한 송이

 

 

붉은 장미꽃은…… 진실과 정열…… 열광적인 사랑?”

차암로맨틱하네. 스가와라는 피식 웃으며 창을 닫으려 커서를 오른쪽 상단에 가져갔다.

…….”

 

이백오십 엔입니다.”

돈을 건네고 거스름돈을 돌려받는 동안, 스가와라는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부모님 생신도, 별다른 행사가 있는 날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꽃집에서 꽃을 사 들고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미친 짓이다. 스가와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운동부 남고생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이다. 그것도 장미꽃이다. 붉은, 장미꽃이다.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쉬고 휴대전화의 주소록에서 자신이 장미를 건넬 상대의 이름을 찾았다. 오늘은 연습이 없는 날이니 쉬고 있을…… 리가 없지. 분명 공터 같은 곳에서 연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 옆에 그의 파트너가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 버튼을 세게 눌렀다. 통화 연결음도 잠시, 귀에 갖다 댄 휴대전화에서 드디어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 상?

놀란 목소리다.

으응, 히나타. ,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혹시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이요?

, 역시 어려운가? 미안해, 갑자기.”

, 아니에요! , , 지금 집인데……! 이쪽으로 오실 수 있겠어요?

스가와라는 웬일로 얌전히 집에 있다는 히나타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 하는 대답에 이어지는 히나타의 산만한, 그리고 알아듣기 어려운 위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출발한다는 말 뒤에 전화 저편에서 들려온 둔탁한 쿵, 콰당 소리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히나타의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스가와라는 곱게 포장된 장미를 손에 들고 심호흡을 했다. 스스로 매사에 꽤나 여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백을 받기는 했어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떨릴 수밖에 없었다. 스가와라는 장미를 들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골목길을 돌았다.

주황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들뜬 마음은, 곧 그의 옆에 서 있는 아이로 인해 잔뜩 가라앉았다.

아하하……. 카게야마도 같이 있었구나?”, 아까 집에 같이 와서요!”

이따가 속공 연습도 하려고 했는데, 하고 신나게 덧붙이는 히나타에게 스가와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무디고 둔한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그 와중에 히나타는 장미를 발견하고 팔짝 뛰었다.

스가와라 상, 이 장미는 뭐예요?”

, ……. 스가와라는 마땅한 변명을 위해 머리를 굴렸다. , 고백하려고. 우리 반 여자아이, 한테. 그래서 너한테 도움을 청하려고 온 거야. 조금만 뜯어봐도 티가 나는 거짓말이었지만 눈치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카게야마와 배구 바보 히나타는 알 길이 없었다.

, 글쎄요. 그런 건 저희보단 스가와라 상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가와라는 마지막까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뭐, 역시 그런가. 그래도 고마워, 하는 것으로 연기를 마쳤다.

둘에게 인사를 건네고 설렌 마음으로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는 시간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걷다가 땅에 주저앉았다. 힘이 빠져 더 걸을 수가 없었다. 고백한답시고 장미를 건넬 계획을 세운 짝사랑 상대는 그의 파트너와 진종일 같이 있고, 고백하기는커녕 연애 상담만 부탁한 꼴이었다. 스가와라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옆에 누가 있든 패기 있게 한 번 건네 볼 걸. 하지만 다시 돌아가기에는 걸어온 길이 꽤 되었다. 스가와라는 일어서 정처 없이 발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풀죽은 장미꽃이 아직도 들려 있었다. 이천오백 엔이 아까워서라기보다, 꽃이 예뻐서라기보다, 전하지 못한 미련이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워서.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집에 도착해 있겠지, 싶어서 길을 나섰으나 낯선 곳인지라 그게 되지 않았다. 히나타가 말해 준 길로부터는 벗어났고, 더 어떻게 길을 찾아야할지도 모르겠고. 히나타에게 전화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마지막 남은 그의 선배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기가 차서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이 한심한 주제에 자존심은 세우겠다 이건가, 싶기도 했다. 그는 마침 보이는 공터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선배로서 후배를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부주장으로서 부원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히나타에게도 다른 부원들과 다를 바 없는 관심을 쏟았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그에게 눈이 가 있고, 히나타-카게야마 콤비를 칭찬하는 것이 힘들었으며, 히나타의 작은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의 감정이 어쩌다 이렇게 커져서 장미까지 사 들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생각해 봐야 뭐하겠어, 이미 망했는데. 그는 몸의 힘을 빼고 벤치에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스가와라 상?”

눈을 감고 있느라 누가 왔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멍한 표정으로 히나타와 배구공을 번갈아보았다.

, , 서브 연습이나 하려고요. 카게야마는 일이 생겼다고 먼저 가고…….”

평소에 가끔 말하던 공터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이다. 스가와라는 상황 파악을 하고 대충 대답했다. 히나타는 머뭇거렸다. 실패, 하셨나 봐요. 스가와라는 그가 자신의 손에 눈길을 주는 것을 느꼈다. 장미꽃이었다. 그에게 주려다가 포기한.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주면 된다는 것을. 지금은 카게야마도 없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 둘뿐이었다. 기껏 사온 장미를 그에게 한 번 줘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은 너무 안타까웠고, 아쉬웠고, 슬펐다. 하지만, 하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아.’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워, 스가와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면 그냥 지나가겠지, 나는 얼마 후에 졸업도 하고. 그는 결국 그렇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히나타는 달랐다. 그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 스가와라 상! 그 장미, 저에게 주시면 안 될까요.”

뜬금없는 말에 스가와라는 응? 하고 반문했다. 히나타는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 저도 고백, 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혹시 드릴 분을 못 만났다거나, 하셨다면요…….”

기세 좋게 소리쳐 놓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하는 히나타가 귀여워, 스가와라는 살짝 웃고는 장미를 내밀었다. 떳떳하게,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받아 달라고, 너를 위해 준비했다고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선물이었다. 스가와라는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말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완전 차인 꼴이지만 줬으니까, 괜찮아. 스가와라는 웃으며 인사했다.

연습 열심히 해, 난 이만 가 볼게.”

스가와라, ! 저 할 말이 있어요.”

역시 뜬금없는 말에 스가와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하고 묻자마자, 히나타는 기다렸다는 듯 장미를 내밀었다.

그게, 제가 스가와라 상을, 아니, …….”

스가와라는 눈치가 빨랐다. 히나타가 전하고 싶은 말을, 그는 참 잘도 알아듣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손에서 장미를 빼앗듯 받아 들고, 도로 히나타에게 내밀었다. 그는 벙쪄 있는 히나타를 향해 속삭였다.

히나타, 붉은 장미꽃이 뭘 뜻하는지 알아? 진실, 정열, 그리고…….”

열정적인 사랑.

그는 장미꽃만큼이나 달아오른 히나타의 뺨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